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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06.08 조회수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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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YS 변덕 뒤집고 사마란치 면접 뚫고…

[제921호] 2010년01월10일 00시20분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출생하는 해부터 격동과 전란의 시대를 살아왔다. 내가 출생하던 해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소학교 1학년 때 중일전쟁이, 5학년 때 태평양전쟁이 각각 발발했다. 해방될 때까지, 즉 개인적으로 성장기 내내 일본군국주의가 지배하는 전시체제에서 시달린 것이다.

    겨우 광복이 되어 독립의 기쁨도 맛보기 전에 좌우 격돌이 있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되자 2년도 못돼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는 대학을 떠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문에 들어가 학생장교로서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이어 4·19, 5·16, 제3공화국의 근대화의 길, 워싱턴, UN, IOC에서의 국제외교, 서울올림픽의 유치 및 성공적인 개최, 국기 태권도의 세계화와 올림픽 종목채택, 한국의 스포츠 강국도약,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 긴 여정에서 국내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 주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남기고자 한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나라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그 나라 사람들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되어 오늘날 세계 최고 최강의 나라가 되었고,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근대화에 성공, 부강한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중화를 자처하는 중국도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를 내세워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기점으로 삼아 강대국의 길을 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6·25전쟁을 겪으면서 나라를 지켜냈고, 88서울올림픽을 통해 국민들이 ‘무엇이든 하면 되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세계로 도약했다. 우리 조상과 선배들의 피땀 섞인 노력 덕에 자원도 별로 없는 이 땅에서 오늘날의 부강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John F Kennedy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을 요구하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동안 쉼없이 달려왔다. 일제시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6·25전쟁 때는 나라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는 산업화, 민주화를 위해 우리는 달려왔다. 앞으로도 경제대국, 문화국가, 복지국가를 향해 더욱 분발해야 한다. 자신감은 이미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충분히 얻었다. 이제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세계로 뛰어들어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진취적 기상이 깊게 심어져 있다. 우리 국민들이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속에 뛰어들어 당당히 맞서 한국을 1등 문화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의 경험과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진솔한 고찰을 담은 이 글이 우리나라가 달려가야 할 새로운 여정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 2007년 7월 과테말라시티에서 2014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 지지연설을 하고 있는 이건희 IOC위원. 연합뉴스  
     
    1993년 내가 대한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으로 취임한 직후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이건희 회장을 추가 IOC 위원으로 지명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지금은 개인 IOC 위원의 경우 70세까지를 연한으로 한 나라에 1명(그것도 220여 개국에서 75명)이지만 그때는 올림픽 개최국은 추가위원을 둘 수 있었다(헌장에 명시). 물론 개최국이지만 추가위원이 없는 나라도 있었다. 따라서 IOC 위원 자리가 한국 몫으로 하나 더 가능하긴 했으나 꼭 확보된 상황은 아니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하 회장)은 학생 때 레슬링선수였으며 삼성그룹 회장으로 여러 경기단체를 이끌고, 또 많은 스포츠팀을 유지하는 등 IOC 위원 자격이 그 나름대로 있는 사람이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IOC 부위원장인 나에게 IOC 위원이 되고 싶다는 희망과 올림픽 운동에 대한 공헌과 열정을 호소한 바 있었다. 이때 아들 이재용 씨도 따라왔었다.

    93년 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IOC 부위원장이고,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 회장이고, 또 IOC의 TV분과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유력한 차기 IOC 위원장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4 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도 IOC 위원을 한 사람 더 늘려야 된다는데 여러 사람이 운동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며칠 내에 한번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대통령과 독대를 하게 됐다. 당시 체육장관, 체육회장 출신들은 전부 거론되었는데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이건희 레슬링협회장 겸 KOC 부위원장을 추천했다.

    내 가 시키고 말고 하는 일은 아니므로 언제, 어떤 식으로 추진을 할까 고심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밤에 갑작스레 청와대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 회장이 중국에 가서 일류는 없고, 이류는 경제고, 삼류는 정치를 운운하는 등 사회 각 분야를 비방하는 발언을 하고 오늘 외국으로 튀었다. 이 회장이 당분간 무서워서 국내로 못 들어 올 것이니 IOC건은 없던 것으로 하라”는 취지의 전화였다. 아직 내가 거론도 못한 단계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며칠 후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서울에 올 예정이라 이건희 회장과 면접을 보게 하고 만찬이라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로 사마란치가 오더라도 (이건희 회장을) 만나게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놀랐다. 그때 이 회장은 일본에 있었는데 사마란치를 소개받기 위해 귀국할 예정이었다. 나는 이 회장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전갈을 보냈다.

    나는 전용기로 사마란치 위원장과 함께 중국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을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도쿄에 있는 이 회장에게 전화로 격려를 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 얼마 안 가서 오해가 풀렸는지 ‘이 회장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청와대의 전갈이 왔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회장이 제일 적합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 후 사마란치는 다음 방한 때 이 회장을 면접, 일종의 테스트를 했다. 스포츠는 무엇이냐, 올림픽운동은 무엇이냐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꽤 만족해서 돌아갔다. 합격한 것 같았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 위원이 공헌하는 방법을 광범위하게 생각하여 그 출신을 왕족, 귀족, 재벌, 선수출신, 스포츠행정가, 기업가 등 여러 부류로 구성하고 있었다.

    95년 부다페스트 IOC 총회에 가는 길에 비행기 연결 차 취리히에서 자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전화를 달라는 전갈이 왔다. 전화내용은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각별히 뜻을 전하여 꼭 이건희 회장의 IOC 위원 선출을 관철시키라는 부탁이었다. 이때는 KOC의 요식행위 등은 필요도 없었고, 내가 이미 정식으로 이 회장을 추천해 놓았고 이 회장도 IOC 본부를 방문하여 견습을 했을 때다. 그러나 부다페스트 총회에서는 IOC 위원을 하나도 뽑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벨란제 FIFA 회장이 미는 리우데자네이루와 서울이 격돌한 1999년 IOC 총회 개최지 선정에 주력했다. 표결 끝에 서울이 따오는 쾌거가 있었는데 이때만 해도 한국 언론은 하도 쉽게 모든 것을 따와서 그런지 이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1996년 애틀랜타 총회와 올림픽 직전에 사마란치가 서울에 들렀을 때 김영삼 대통령과 오찬을 같이 했다. 이때 사마란치는 아직 시기상조지만 2년 후에 자기 후계자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오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IOC 수장이 될 때 자기 정부(스페인)와 왕이 많이 후원했다고 했다. 이때 김 대통령은 한국의 IOC 위원 추가를 부탁했다. 이때는 ‘IOC 위원은 IOC를 대표하며,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며, 덕망이 있는 인사를 지명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사마란치는 귀국 후 검토해서 나를 통해 알려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알릴 때처럼 전화를 해왔다. 검토했는데 이번에 안 되겠고 다음으로 연기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그 내용을 알렸더니 아주 불만스러운지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했다. 무엇이 다른지 몰라도 내가 가서 챙겨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사마란치 위원장과 상의했더니 다른 사람을 시키면 뒤통수 칠 가능성이 있는데 이건희 회장은 비즈니스에 바빠 시켜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시기가 문제인데 꼭 내 입장이 곤란하면 시켜주겠다고 했고, 대신 북한의 장웅 NOC 부위원장도 4년째 대기 중인데 나에게 IOC 집행위원회에서 반대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렇게 이건희 회장과 장웅 북한 NOC 위원장은 애틀랜타에서 나란히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나는 IOC 제1 부위원장이고 TV분과위원장이었는데, 차기 IOC 위원장을 둘러싼 사마란치 후계구도에서도 가장 유력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많은 기업이 스포츠팀을 해체하고 경기단체에서 손을 뗐던 IMF 때도 나의 간청을 들어 스포츠팀을 유지했고, 한국 엘리트체육을 지탱해 주었다. 삼성이 맡은 경기단체만 해도 육상 태권도 배드민턴 탁구 레슬링 승마 등이 있었다. 삼성은 4500만 달러를 내고 IOC와 애니콜 공식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는데 사마란치와 이 회장의 입석 하에 나와 윤종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명을 했다. 그 후 삼성휴대전화는 급속히 세계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시드니 올림픽 때 남북한 동시입장 후 남북체육협력이 시작된 다음 북한 선수촌에 훈련장비와 스코어보드 등도 삼성이 지원했고, KOC의 체육박물관 건립에도 1억 5000만 원을 지원해서 모양새를 갖추고 개관을 하게 도와주었다. 올림픽선수단 지원은 물론이다.

     
     
      ▲ 1996년 이건희 전 회장의 IOC위원 선임 축하모임에서 김운용 전 부위원장이 축하해 주는 모습(윗사진). 김운용 전 부위원장, 사마란치 전 위원장, 이건희 전 회장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내가 만나본 이건희 회장은 정말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세계관과 비전도 있고 연구를 많이 한다. 서울사범부속고교에 있을 때 레슬링선수를 한 진정한 체육인이기도 하다. 특히 88서울올림픽 기간 때는 경기장에 살다시피했고, 회사일은 밤에 챙길 정도로 모든 정열을 쏟았으며 선수와 임원들에 대해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회장과 인연을 회고해보면 만날 때마다 세계화에 있어서 누구보다 앞장섰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계화라는 말이 아직 한국인의 귀에 익숙지 않았던 시절, 그는 상당히 높은 식견으로 세계와 경쟁을 해야만 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말했다. 삼성그룹의 모토가 ‘세계일류’라는 것을 강조했다. 삼성이 그때 수억 달러씩 반도체 개발에 연구비를 투입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몇 년 안 가서 삼성이 반도체부문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한국에서 1등이 아니라 세계에서 1등이 되고, 그러기 위해 줄기차게 경영혁신과 의식개혁을 단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었다.

    재 미있는 일화가 있다. 2008년 스페인에서 사마란치 IOC 종신명예위원장을 만났더니 “이해가 안 간다. 코리아 지도자들이 유럽에 와서 대접받는 것은 자신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삼성 현대 대우 LG 등이 경제를 일으킨 덕이 아니냐.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어떻게 김 위원장을, 88올림픽을 유치해 성공시키고 태권도를 올림픽에 넣은 사람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각 분야의 넘버 원을 차례로 치는 모양이다. 스포츠 넘버 원인 당신을 치고, 지금은 비즈니스 넘버 원인 이건희를 치는 모양이다”라고 꼬집었다. 자세한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그 나름의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기업 총수들이 겪었듯이 주식 승계, 비자금, 탈세 등으로 3년 징역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 형을 받았다가 특별사면되었다. 올림픽 소식지인 <스포츠인턴>에 따르면 이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한번 사면을 받았다 한다.

    이건희 회장의 특별사면은 평창동계올림픽 3수 유치전 때문이라고 한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놓고 2011년 IOC 총회 때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안시와 격돌할 예정이다. IOC 위원의 반수를 유럽이 점유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쉬운 싸움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운동시합과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공헌이 있기를 바란다. 그보다 글로벌기업인 삼성의 총수로서 한국경제 발전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


    김운용 전 위원장 약력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및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체육회장을 지내는 등 모교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고,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수상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대학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 장교로 입대해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켰다. 이후 중령으로 예편했고, 국가유공자(무공훈장)로 지정됐다.

    -뛰어난 어학실력을 바탕으로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의 의전비서관을 거쳐 주미대사관 참사관, UN총회 한국대표부, 주영대사관 참사관 등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1971 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에 취임한 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 및 명예총무 등으로 국내 스포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국기원과 WTF(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는 등 태권도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태권도는 2000년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등 세계 최고의 무도스포츠로 발전했다.

    -1986년 IOC 위원 선출 후 세계적인 스포츠 지도자로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GAISF(국제경기연맹) 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분과위원장, 최단기간 만에 IOC 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선출, 유색인종 최초의 IOC 위원장 선거 출마 등 입지전적인 행보를 보였다.

    - 이 사이 한국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물론이고, 1997년 무주전주 동계U대회와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한일월드컵, 2003년 대구하계 U대회를 유치함으로써 ‘동방불패’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고, 특히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의 남북동시입장은 전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역임했고, 16대 국회에서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했고, 47명의 국회의원과 14명의 외교전문가로 구성된 ‘국회한미포럼’의 회장을 맡았다(2000년 ‘국감을 빛낸 인물’ 선정).

    -2004 년 정치권력의 의중이 담긴 사법처리를 당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으나, 정권이 바뀐 후인 2008년 8월 특별복권됐다. 2009년 현재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미국 ASU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고, 대한태권도협회 종신명예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부인 박동숙 씨와의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아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스포츠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1989년부터 시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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