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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내가 만난 사람-손기정

[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07. 내가 만난 사람-손기정

[중앙일보] 입력 2009.01.22 19:04 / 수정 2009.01.23 01:01

이승만 대통령 도와줘 과자공장 경영
서울올림픽 성화 주자 선정 때 1순위


손기정(右)씨에게 올림픽 100주년 기념패를 전달하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때인 1936년 아버지를 따라 대구 만경관에 가서 본 영화가 베를린올림픽 공식영화 ‘민족의 제전’이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봤다. 일제시대에 한국인의 기개를 떨친 대단한 뉴스였다. 어린애인 나도 기뻐할 정도였으니까. 만경관은 손기정의 쾌거를 보려는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다섯 살 위인 형으로부터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큰 일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형도 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마 신문사(조선민보사)에 재직 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일장기 말살 사건은 동아일보 체육부 이길용 기자(이태영 전 중앙일보 체육부장의 선친)가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바람에 동아일보가 정간을 당한 사건이다.

손기정은 마라톤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 메이지대에 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40년 도쿄올림픽과 44년 헬싱키올림픽은 취소됐다.

손기정의 영향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나도 학창 시절에 마라톤을 한다고 조용택이란 복싱선수와 창경원 전찻길을 달리곤 했다. 우리를 보고 “마라톤 선수냐”고 물어보는 어른들도 있었다.

손기정은 45년 광복 후 환호성으로 뒤덮인 서울운동장에 나타났고, 46년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할 때 감독으로 활약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으로 조그만 과자공장을 경영했는데 자유당 말기 어수선한 시국 등으로 인해 사업이 잘 안 됐다. 내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 그의 가족이 도움을 요청하려고 우리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 힘으로는 도와줄 방법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손기정은 한국 체육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서울올림픽 성화 주자를 정할 때 그는 당연히 1순위였다. 백발을 휘날리며 성화를 봉송하는 그의 얼굴이 참으로 환하게 빛났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는 사마란치의 특별초청을 받아 현장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자신은 일장기를 달고 우승했지만 태극기를 달고 뛴 황영조가 우승함으로써 “56년 만에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상연맹과 대한체육회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96년 올림픽 100주년을 맞아 나는 손기정 옹에게 올림픽 100주년 기념패를 증정했다. 마침 그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는데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서로 오갔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올림픽 기념비에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어 늘 말썽이었다. IOC 위원으로 있으면서 수정하려고 몇 차례 노력했는데도 IOC는 국적을 바꾸지 않는다.

손기정 옹은 2002년 11월 15일 만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자기가 시작한 분야에서 최고에 오르고 평생 외길을 달려온 사람을 존경한다. 손기정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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