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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1.06 조회수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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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2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74회)


              


올림픽을 인류 최대 제전으로 이끈 사마란치-2 (74회)


   - 제12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사마란치 공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서울올림픽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올림픽 사(史)에 영원히 남을 획기적인 사건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서 사마란치는 결코 잊히지 않을 커다란 역사적인 존재가 되었다. 1981년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서울 코리아(Seoul Korea)’라고 발표한 사마란치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많은 한국인들도 그때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사마란치는 물론 우리 국민들도 서울 올림픽이 이 정도로 성공을 하고 훌륭한 유산(Legacy)으로 남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울 올림픽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보이콧으로 인해 반쪽으로 치러진 올림픽이 12년 만에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물고 전 인류가 함께 모여서 평화 시 인류의 최대종합제전으로 승화시키는 감동의 무대였다.

서울 올림픽 개최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IOC에 있어서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동서 이데올로기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분단국가 한국. 아직 개발도상국의 티를 벗어나지 않은 아시아의 소국에서 인류 최대의 제전을 실패 없이 치러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전 세계적으로 들끓고 있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과연 참가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저력과 사마란치를 비롯한 IOC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반으로 서울 올림픽은 과거 어느 올림픽보다도 훌륭하고 성공적인 대회를 치를 수 있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올림픽 참가 이후 최초로 세계 4위의 성적을 올렸다. 폐회식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올림픽이었다”고 감격스러워하며 마지막을 장식한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서울 올림픽은 한국이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전기가 되었고, 스포츠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는 결과가 되었다.

사마란치는 스페인이 입헌군주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바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치 현황에 대해서 남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지닌 지한파다.

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87년 가을, 한국 대통령 선거 투표 당일의 일이다. 그는 IOC 본부가 있는 로잔으로부터 30분 간격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선거 개표 현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처음 전화를 한 것은 점심 때였기에 상황을 알려주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한국 시간으로 심야 시간이 되었어도 사마란치 위원장은 전화를 30분 간격으로 계속해 왔다. 전화 소리에 깨어나서 그때마다 TV의 개표 속보를 보며 사마란치와 말을 하고 있던 나의 모습을 본 아내가 “사마란치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다음날 대통령 선거 결과가 판명된 후, 다시 사마란치 위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전화의 내용은 이랬다. “김 위원, 어젯밤에는 정말로 미안했소. 하지만 한국의 정치가 불안정하면 올림픽 개최에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기에 그런 것이요.”

그는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 위해서 음양으로 뒤에서 지원하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을 방문해서 서울이 동서화합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설득하면서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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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서울올림픽 태권도 시범경기 때 사마란치위원장과 함께

서울 올림픽이 성공한 뒤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지금부터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그 품성과 저력으로 가까운 장래에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서울에 올 때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행동하며 많이 배웠다. 공식 스케줄 이와에 그의 사적인 시간은 주로 나와 같이 했다.

그는 술,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식사할 때에는 와인 한두 잔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녁 9시에는 일을 마치고 10시에는 꼭 침실에 들었다. 아침은 필히 1시간 이상 운동을 하였다. 일요일에는 세계 어디를 가도 미사에 필히 참석했다. 이것은 수십 년간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부인 비비스(Bibis)는 정말 교양있고 덕 있는 최고의 여성(First lady)이었다.

1982년 박종규(당시 대한사격협회장) 씨가 사마란치를 요정으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 사마란치는 향응이 제공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초청자 측의 얼굴을 생각해 약 30분 정도 동석을 한 후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만 한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빈틈이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2003년 내가 평창동계올림픽 방해 운운하는 정치 공세로 희생양이 된 후에는 초청 받아도 오지 않았다.

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사마란치만큼 한국을 많이 찾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한국을 30회 이상 방문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국가 원수나 톱클래스의 사람들만 만나면 한국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또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유치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사마란치 위원장은 마치 자국의 일처럼 우리를 도와주었다.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유치 지원 요청을 받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FIFA 회장인 아벨란제(Havelange)는 일본과 가까운 사람으로 한국의 단독 개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분위기도 일본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란제를 반대하는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지역은 FIFA 집행위원 한일 공동개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마침 아벨란제가 브라질 올림픽 개최문제로 IOC에 브라질 대통령과 함께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완고한 사람이지만 내가 아벨란제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공동 개최라도 관계없으니 한국이 월드컵 개최지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십시오.”라고 사마란치에게 호소했다.

투표 전날까지 누구도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서 무수한 정보들이 혼재되고 있었다. FIFA 본부 앞에서는 수많은 각국의 기자들이 다음날의 투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란치는 아벨란제와 단독 회견을 한 직후 나에게 긴급히 전화 연락을 했다. 그때 나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미스코리아 운영위원장으로 미스코리아 심사위원과 한국일보 간부들에게 신라호텔에서 만찬을 베풀고 있었다. “아벨란제가 공동 개최를 승낙했습니다. 내일 정식으로 한․일 공동개최가 발표될 것이니 대통령에게 비공식적으로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나는 바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김영수 문화체육부 장관에게도 알려주었다. 한국 유치단은 FIFA 본부가 있는 취리히에서 브리핑과 표 대결 준비에 바빴다. 그러나 밤 사이 일본을 설득한 아벨란제는 다음날 한․일 공동 개최가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어느 조직이건 조직의 장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 말대로 킬라닌(Killanin), 로게(Rogge), 바하(Bach)가 이끈 IOC와 사마란치가 이끈 IOC는 모든 면에서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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