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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1.09 조회수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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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2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75회)


              


올림픽을 인류 최대 제전으로 이끈 사마란치-3 (75회)


   - 제12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1994년 파리에서 열린 103차 IOC 총회는 한국 스포츠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총회였다.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한국인의 열망뿐만 아니라 당시 전 세계 5,000만 태권도 가족들에게 있어서도 숙원이었던 것이다.

이때에도 사마란치(Samaranch) 위원장이 전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당시 북한이 밀어붙였던 국제태권도연맹(ITF: 회장 최홍희)은 세계 각국에 중상모략의 문서를 돌리는 등 방해 공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고, 회의장 주위에서도 ITF 임원들이 강력한 반대 공작을 하고 있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걱정하지 말고 예정대로 당당히 IOC 위원들에게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야 한다는 타당성을 설명하세요”하고 나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더욱이 그는 처음부터 의제로 올리기보다도 임시 집행위원회의 마지막 안건으로서 상정하는 것이 반대 세력의 반발을 피해 총회에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우리 전략에 동의하면서 우리를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오랫동안의 친구로서, 올림픽 진흥운동의 동료로서 함께 일해 온 사마란치 위원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훨씬 더 훗날에나 가능하였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마란치가 오늘과 같이 성공을 하였던 것은 올림픽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바쳤기 때문이다. 개인의 PR이나 부를 위해서 IOC 위원장직을 이용하였더라면 격렬한 국제무대에서 과연 그 지위를 온전히 지켜낼 수가 있었을까? 더군다나 IOC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UN 다음 가는 거대 조직이니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로부터 상당히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이상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인생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는 급료를 받지 않는다”며 절반은 농담 식으로 자주 말을 하기도 했다. 자기의 인생 전부를 바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일들을 하고 있으면서 IOC에는 그것에 걸맞은 급료를 지불할 정도의 윤택한 자금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림픽 이념을 위해 공헌하는 자원봉사라고 조용히 말한다. 이러한 정신 속에 그는 서울 올림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제사회로의 복귀, 유고슬라비아 문제 해결, 구소련의 올림픽 참가 등 수많은 정치적 문제들도 해결해 왔다.

그는 나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든다고 솔직히 말하곤 하면서 “김 부위원장이 없으면 전혀 일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과거 한국이 정치적 격동기에 처해 있었을 때, 갑작스런 사태가 예상될 것 같은 때에는 필히 전보를 쳐 주거나, 안부 확인의 전화를 걸어서는 나의 안전을 확인하는 등 다정다감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1990년 내가 망막격리 치료를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을 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확인해 주었고 그뿐 아니라 스위스 병원에서 수술 후의 경과를 점검할 수 있도록 알선해 주기도 하였다.

사마란치는 언제나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 독립한다고 말하지만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은 스포츠 지도자이지만 만나는 사람의 70% 이상이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고, 그가 종사하는 일의 70% 이상은 정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그가 항상 말할 정도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사마란치 위원장, 라냐 IOC위원과 함께.jpg
             ▲ 2008 베이징올림픽, 사마란치 위원장, 라냐 ANOC위원장

대표적인 예로, 1992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이 있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지역 분쟁과 종교 분쟁을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휴전할 것을 각국에 호소하며, 스스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고슬라비아까지 방문하여 올림픽 정신의 실현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

한편으로는 남북한 체육회담, 올림픽 보이콧 문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제사회 복귀, 그리고 유고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제한을 결정한 UN 안보리 제재안의 철폐를 호소했다. 사마란치는 남북이 아직까지 대치 상태에 있는 것에 못내 아쉬워했다. 그 때문일까. 그는 IOC 차원에서 남북이 스포츠로 대화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88년 서울 올림픽 실시에 있어서는 남북 분산 개최 문제를 놓고서 4차에 걸친 남북 회담을 했다. 북한 선수단에게 4차례에 걸쳐 식량을 보내는 등 열과 성을 보여 왔었다. 올림픽과 아시아 경기대회 때에는 단일팀을 구성하면 좋을 것 같다고 북한의 NOC와 IOC 위원에게 제의함과 동시에 1998년 IOC 집행위원회 종료 후에는 독일의 바흐 IOC 집행위원을 북한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때 북한 선수단에 벤츠 버스도 기증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올림픽에 복귀시켜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해 왔으며,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은 전 세계가 전쟁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하는 평화 휴전을 제의해 미국에 의한 이라크 폭격을 막았다. 유고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사라예보의 올림픽 경기장을 위해 2,000만 달러를 지원해 복구시켰다.

이러한 정치적인 제반 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각국 수뇌들을 접촉하는 등 정열을 쏟았다. 또한 2개의 중국 문제, 분열된 소련 연방 각국의 공동 또는 개별 올림픽 참가 문제 등 수많은 정치적 사안 등을 처리함으로써 진정한 스포츠 운동과 올림픽 정신이 실현되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을 철폐해 올림픽 참가 자격 문제는 각국의 국내 위원회에 맡겨 자국에서 부적합한 이유가 없는 한 모든 선수가 모여서 최고 수준의 경기를 치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는 아마추어, 프로에 관계없이 스포츠를 생활화하는 모든 선수가 정부 또는 대회 주최자 측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여기에 대해서 아마추어 정신을 옹호하는 올림픽이 상업주의에 한층 더 오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비난이 일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마란치는 보편적인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스포츠는 혼자서는 성립이 안 된다. 돈이 스포츠와 선수를 지배하는 것은 안 되지만 스포츠를 위해서 돈이 쓰인다면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며, 그는 상업주의 경향이 오히려 올림픽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성립하는 것 자체가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류가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올림픽 정신을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보존하고, 그것이 모든 운동의 근본이 되어야만 그것을 지지하는 역할이 건전한 상업주의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희망과 목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갖고 있다면 언어, 피부 그리고 민족의 벽을 얼마든지 넘을 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바하 위원장도 스포츠만이 분쟁중인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연결시킨다고 자랑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자신감에 의해 만연되어버린 올림픽의 상업주의와 승리 지상주의에서 비롯된 올림픽의 국수주의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IOC 위원장 임기 만료 직전에 보여 주었던 그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를 저버릴 수 없다.

결국 사마란치는 그의 훌륭하고 찬란한 업적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학같이 고고했던 그가 자기 자식과 지나친 IOC 권좌에 대한 욕심, 그리고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속으로 간직하고 있던 백인 우월주의는 그의 업적을 퇴색시키는 결과를 빚게 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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